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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4일은 대만의 첫 퍼스트 레이디, 송미령(宋美齡)의 기일.

우리팬 2007. 10. 23.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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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송가황조 (宋家皇朝: The Soong Sisters, 1997)

<송가황조(宋家皇朝)>라는 영화가 있다. 중국의 근대시기, 송씨 집안의 세 딸이, 제각기 당시 격전의 혼란한 상황에서 중국에 있어 영향력 인물에게 시집을 가는데, 시집을 가서가 아니라, 세 자매는 당시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중국 엘리트 신여성의 첫번째 등장이었고, 결혼 이후에도 제각기의 위치에서 중국, 그리고 지금의 대만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큰딸 송애령(宋靄齡)은 당시 금융의 큰 손이었던 공상희(孔祥熙)와 결혼을 하고, 공식적으로 활동을 하기보다는, 그저 자매들의 곁에서, 그리고 개인적인 활동에 치중했다, 라고 알려져 있다. 둘째딸 송경령(宋庆龄)은 중국과 대만의 국부(国父) 손문(孙文)과 결혼을 하고, 손문의 사후에도 중국 공산당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다 198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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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송미령은 당시 국민당의 실권자인 장개석(蒋介石)과 결혼을 한다. 송미령 역시 국민당 실권자인 장개석의 부인이자, 국민당 중앙 평의위원회 주석단의 주석으로써 특히 미국과의 대외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들의 대강의 인생이야, 영화 한편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사실 나 역시도 꽤나 오래전에 봤지만, 송미령이란 인물을 약간은 과소평가된 채 표현된 것이 안타까웠다. 뭐, 역시나 장개석이란 인물을 빼놓을 수 없는데, 영화 속에선 야망찬 남정네에 의해 두번째 부인으로 결혼을 하게 되지만, 그녀 입장에서 본다면, 그녀 역시 남자를 제대로 골라 그녀의 능력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터이다. 미국의 국민당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 뭐, 당시 상황이야 이념문제로 인해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2차대전의 혼란 속에서, 그리고 후에는 한국전쟁에서도 조그나만 섬에 틀여박히게 되는 국민당이 지금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녀의 미국에 대한 외교적 활동의 영향이 기틀을 세운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녀가 대만으로 건너간 후에는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미국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2003년 10월 24일에 별세를 한 그녀, 나 역시도 이때 중국 난징(南京)에 있을 때였는데, (남경은 중화민국의 수도이며, 지금도 당시의 총통부(总统府)와 국부 손중산의 중산릉(中山陵)이 있는 곳이다.) 이 날 아침부터 TV에서 그녀의 부고소식을 떠들썩하게 전하고 있었다. 100년 이상을 산 그녀, 큰언니 송애령이 83세, 둘째언니 송경령이 88세... 그녀는 무려 106세까지 살았다.

이상은, 그녀의 간단한 약력, 근데... 1966년에 우리나라 훈장도 받았더니만.

1987년 3월, 상해 출생
1910년 (혹은 1907년), 미국 유학
1927년 12월 1일, 장개석과 상해에서 결혼.
1936년 12월, "서안사변(西安事变)"에 남편을 적진에 뛰어들어 구하러 감.(营救丈夫)
1942년 2월, 장개석과 인도 회동.
1942년 11월, 미국 방문
1943년 2월, 미국 국회에서 연설
1943년 11월, 퍼스트 레이디 신분으로 장개석과 함께 '카이로 회담'에 참석
1949년, 미국을 방문했으나 원조를 얻지 못하고, 큰언니 집에서 기거.
1975년 4년, 장개석 별세 ; 9월 미국으로 건너가 은거.
1986년 10월, 대만으로 돌아와 <我将再起>라는 선언서를 발표.
1991년, 다시 대만을 떠나 미국에서 은거.

2003년 10월 24일, 미국에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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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宋庆龄에 관한 DVD 자료를 보고, 포스트를 한번 해볼까... 하다가, 가족 소개만 했었는데-_- 이번 역시, 송미령에 대한 자료를 포스팅하기보다는... 맛배기만.-_-; 그녀의 미국 은둔생활에 대한 이야기나, 또 이런저런 사생활에 관한 글들이 많던데... 아, 이 귀차니즘, 게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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