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na/→ 南 京

《桃花扇》, 南京 秦淮河의 李香君 그리고 媚香樓.

우리팬 2007. 3. 13.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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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淮는 이름그대로 중국의 첫황제인 秦始皇이 만든 하천이다. 만들었다기보다는 어느 점술가가 장강 근처에 왕기가 느껴진다하여, 그 말을 들은 진시황은 사람을 동원해 장강의 일부를 메워서 끊어진 부분이 바로 秦淮河다. (실제로 500년 후에 왕조가 생겨났다고 한다. 흠흠.) 六朝古都(吴,东晋,宋,齐,梁,陈)였던 南京에는 新街口, 湖南路 狮子桥와 같은 번화가가 있는데, 역사적으로 본다면 가장 번화한 곳이 다름 아닌 秦淮河를 끼고 있는 夫子庙 부근이다. 뭐, 얘길하자면 꽤나 길어지는데-_- 六朝 시대에는 문벌귀족들의 세력이 강했고, 화려한 귀족문화가 융성했던 시기였는데. 南京(당시 이름은 健康이었다.)의 夫子庙 부근은 당시 문벌귀족들이 모여살던 주택가였다. 뭐 강 하나 끼고 귀족들을 위한(?) 홍등가가 생기게 되었고. 이런저런 로맨스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지금은 그저그런(?) 관광지내지 쇼핑가 정도이고. 종종 가긴 했지만... 몇번 가고나면 질려서리.-_-+ (일본의 유명한 작가, 타지나키 준이치로도... 여기서 응아응아... 흠흠.-_- 노신은 공자의 사당 부근이 사람들을 위한 놀이터로 바뀌었다고 냉소했다.)

홍승()의 《장생전(殿)》과 함께 청대 희곡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진다. 1690년( 29)부터 1699년까지 세 차례의 개작 끝에 완성된 작품으로 명말()의 공자()인 후방역()과 기생 이향군()의 사랑의 파란을 줄거리로 하고, 여기에 명말()의 부패한 사회상을 풍자한 작품이다.

 후방역은 이향군을 기루()에서 건져내고 부채에 시()를 써 준다. 그 후 후방역은 완대월()의 중상모략으로 체포령이 내려져 난징[]을 떠난다. 완대월과 고향이 같은 전앙()이란 자가 이향군을 첩으로 맞아들이고자 하나 향군은 정조를 지키며 필사적으로 반항한다. 혼절하여 머리를 땅에 부딪혀 이마에 상처가 나고 부채는 피로 물든다.

 며칠 후, 향군이 낮잠 든 사이에 양문총은 부채에 묻은 피를 복사꽃으로 여기고 가지와 잎을 곁들여 그려서 도화선을 만든다. 후방역이 난징에서 돌아왔으나 향군은 이미 대궐에 불려 들어간 후여서 만나지 못하고 체포된다. 그 후 청()나라 병사에 의해서 난징은 함락되고 후방역은 옥에서 탈출하여 산으로 피신하는데, 여기서 도교()에 귀의한 향군과 재회하게 된다.

 두 사람은 부채를 바라보며 서로 그립던 얘기를 주고받는데, 이것을 본 장도사()가 부채를 찢어 팽개치며 나라가 위태로운 이 시기에 아직도 정근욕종()을 그리워하느냐고 꾸짖자, 이에 크게 깨닫고 이들은 도교에 입신한다.

 작품의 등장인물이나 사건은 모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인물들을 근거로 하고 있다. 젊은이의 연애이야기가 줄거리를 이루면서도 명말 부패한 정치 현상과 나라를 그르치는 간신들의 행동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문장 가운데 인생의 부귀는 뜬구름 같은 것이라는 애수가 숨겨져 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출처 : http://www.yingbing.cn

중국에선... 실존인물이었고, 일대 명기라는 칭호와 함께, 秦淮八艳 으로까지 일컬어졌으며, 고상한 애국정조를 표현한 인물이라 평가받고 있다. 역시, 정사와 《桃花扇》의 내용과는 차이가 있다.


李香君故居座落在夫子庙钞库街38号,秦淮河畔来燕桥南端、是三进两院式宅院。全院尽现书法、绘画、楹联、
篆刻、假山、塑像和园林小景、石刻砖雕、壁画挂灯等艺术精品,供游人观赏。李香君是秦淮一颗璀灿的明珠,秦淮八艳之一;这个出身秦淮名妓的下层妇女之所以受人仰慕,不在其花容月貌,而在于她有着强烈的正义感、爱国心和高尚的情操,愤世嫉俗,显示出难能可贵的精神。出污泥而不染,濯清涟而不妖,眷怀故国。

출처 : http://www.cts.com.cn/

출처 : http://www.jiangsuok.com/

주소 南京市中心 正南夫子庙 钞库街 38号 문표값은 6元 개방시간은 Am 8 ~ Pm 9.


흠... 우리나라 쪽에서 다시 찾아보니, 에로물 비됴로까지 나왔구나...-_-+



원문 포스트 : 2005/07/05 07:58, 07.03.13 19:10에 앞의 秦淮 설명부분 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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