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杭州 宋城의 송대 문인(文人)들.

우리팬 2006. 10. 25.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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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자 : 06년 7월 14일

송나라는 문치주의 위주의 왕조였고, 그리하여 많은 문인들을 배출해낸 시기였다. 근데, 사실 따지고 보면 苏轼(일명 소동파)를 제외하곤 그리 제대로 알고 있는 문인이 없었는데, 杭州 宋城 내부에... 몇몇 문인들의 석상들이 있더라고. 먼저...

易安居士 李清照

일명
(이안거사)라 불리우는 李清照(이청조)는 山东 章丘 사람으로, 宋词(송사) 작가의 대표적 문인으로 아버지 李格非(이각비)는 당시 저명한 학자였으며 , 남편 赵明诚(조명성) 역시 金石文 고증학자였다. 북송시절 금나라의 침략으로 남편을 따라 남방으로 내려왔으나, 오래지 않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여기저기 유랑을 하며 유유자적한 생활에 관한 글을 썼으나 후기에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또한 떠나온 중원 고국을 그리워하는 글을 썼다. 오늘날 사람들이 편집한 <李清照集校注>이 있다고 한다. 뭐, 자세한 소개는 여기 있고.


东坡居士 苏轼

소동파 苏轼는 설명할 필요도 업이 굉장히 유명한 문인 中의 한 사람이다. 개인적으론 문장보다는-_- '东坡肉'라는 요리를 먼저 접하게 되었는데... 흠흠, 그냥 네이버 백과사전 소개가 더 적법할 것 같구만.-_-;;;

메이산[眉山:지금의 四川省] 출생. 자 자첨(子瞻), 호 동파거사(東坡居士), 애칭(愛稱) 파공(坡公) ·파선(坡仙), 이름 식(軾). 소순(蘇洵)의 아들이며 소철(蘇轍)의 형으로 대소(大蘇)라고도 불리었다. 송나라 제1의 시인이며, 문장에 있어서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22세 때 진사에 급제하고, 과거시험의 위원장이었던 구양 수(歐陽修)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후원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이 실시되자 ‘구법당(舊法黨)’에 속했던 그는 지방관으로 전출되었다.

천성이 자유인이었으므로 기질적으로도 신법을 싫어하였으며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일이 재앙을 불러 사상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켜 서울로 호송되어 어사대(御史臺)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이 때 나이 44세였다. 심한 취조를 받은 뒤에 후베이성[湖北省]의 황주(黃州)로 유배되었으나, 50세가 되던 해 철종(哲宗)이 즉위함과 동시에 구법당이 득세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 등의 대관(大官)을 역임하였다.

황태후(皇太后)의 죽음을 계기로 신법당이 다시 세력을 잡자 그는 중국 최남단의 하이난섬[海南島]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던 중, 휘종(徽宗)의 즉위와 함께 귀양살이가 풀렸으나 돌아오던 도중 장쑤성[江蘇省]의 상주(常州)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폭넓은 재능을 발휘하여 시문서화(詩文書畵) 등에 훌륭한 작품을 남겼으며 좌담(座談)을 잘하고 유머를 좋아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으므로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涑水先生 司马光

역시나 네이버 백과사전 인용... -_- (중국 고대문학 쪽은 우째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자 군실(君實). 호 우부(迂夫)·우수(迂叟). 시호 문정(文正). 산시성[山西省:夏縣 涑水鄕] 출생이다. 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고도 하며, 죽은 뒤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으므로 사마온공(司馬溫公)이라고도 한다. 20세에 진사가 되고, 1067년 신종(神宗)이 즉위한 해에 한림학사(翰林學士), 이어서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신종이 왕안석(王安石)을 발탁하여 신법(新法:革新政策)을 단행하게 하자, 이에 반대하여 새로 임명된 추밀부사(樞密副使)를 사퇴하고, 1070년에 지방으로 나갔다. 당시 그는 편년체(編年體)의 역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쓰고 있었다. 신종도 그 책의 완성을 크게 기대하여 편집의 편의를 제공, 그의 뜻대로 뤄양[洛陽]에 거주하며 편집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돌봐주는 등 원조를 아끼지 않았으며, 1084년 마침내 전 20권의 《자치통감》을 완성하였다. 이듬해 신종이 죽고 어린 나이의 철종(哲宗)이 즉위, 조모인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섭정이 되자, 신법을 싫어하는 태후에게 발탁되어 중앙에 복귀, 정권을 담당하였다.

당시의 연호(年號)를 따서 ‘원우(元祐)의 재상(宰相)’이라고 일컬어졌다. 재상이 되자 왕안석의 신법을 하나하나 폐지하고 구법(舊法:保守政策)으로 대체하여, 구법당(舊法黨)의 수령으로서 수완을 크게 발휘하는가 하였으나, 몇 달 안 되어 죽었다. 그뒤로 신법당(新法黨)이 세력을 얻자, ‘원우(元祐)의 당적(黨籍)’(블랙리스트)에 올라 냉대를 받았으나, 북송 말부터는 명신(名臣)으로 추존되었다. 저술로는 《자치통감》 외에 《속수기문(涑水紀聞)》 《사마문정공집(司馬文正公集)》 등이 있다.


우째... 宋城에서 내 관심 속의 왕안석(王安石)에 대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던 것 같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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