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今.生.有.約./→ 雜感

'샤프'에 관한 이야기.

우리팬 2008. 3. 2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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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기구는 역시 일제다? ... 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이 중학교때부터였던 것 같다. 초등학생까지는 무슨 필기구를 쓰던지 상관없었던 것이 반친구들끼리도 그렇게 누구 집이 부자니, 가난하니 해서 필기구로 인해 위화감을 조성하는 것이 적었었고, 또한 아부지는 '외제'하면 치를 떠셨던 분인지라, 내 입에서도 감히 '일제'니 '미제'니 할 수도 없었다.

중학교때부터는 달랐다. 일반 공립중학교였는데도 불구하고, 부산 남천동의 사립 초등학교의 얘들이 꽤나 많았는데, 그 동네 자체가 돈 많기로 소문난 동네였고 (지금도 여전하지만서도) 덕분에 비싼거, 신기한거, 재미난 것을  참으로 많이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뭐, 사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그저 당시엔 조금(?) 앞서 컴터 오락에 빠져살던, 그저그런 평범한 학생이었으니까.


이 샤프는 중2땐가... 반에서 유행했던, 것도 일명 공부잘하고 집 좀 잘 사는 아해들이 주로 사용했던 샤프였는데, 나 역시도 그 분위기에 휩싸여 이 샤프에 대해 욕심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당시엔 공부잘하는 아해가 하는 공부 방법, 또 그 넘이 보는 학습서나 연습장을 살짝 엿보고 따라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일반 샤프가 1,000원이었던 것에 반해 이 샤프는 2,500원 정도로, 2.5배나 되는 샤프를 사기엔 역부족이었다. 또한 학교근처, 그리고 집근처 문방구에서도 팔지도 않는 물건이었고.

어느날, 친구 넘 중에 남천동에 사는 아해에게 부탁을 했다. "좀 사도..." 그리고 엄니를 졸라서 샤프값 1,000원을 받아내고, 몇일간 모아뒀던 용돈을 보태서 결국 하나 사긴 샀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때는 참으로 특이했던 샤프였다. 일본의 Zebra 샤프를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거니와, 손잡이 부분에 땀이 안베이게 하는 고무가 붙은 샤프 역시 거의 찾기 어려웠으니까.

결국 꿈에 그리던(?) 저 샤프를 획득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수업시간이니, 자습시간이니 열심히 사용했었다. 근데, 근데... 어느날, 이 샤프가 없어진 것이다. (산지 일주일도 안되었을 무렵으로 기억한다.) 어디로 갔지? 내가 다녔던 학교는 학생들의 경제적 차이가 꽤나 났던 곳이었던지라, '도난'외엔 사라질 이유가 없었다. 샤프 하나 찾는다고 50명에 가까운 얘들의 필통을 뒤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새로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소시적, 나름 상처를 남긴 사건이었다. 에구... 아까워라. 그 후론 절대 비싼 필기구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2002년 즈음에, 학부 졸업을 남겨두고 학교 앞 팬시점에 갈 일이 있었는데, 바로 이 샤프가 눈에 띄는 것이다. 어랏? 얼마나 반갑든지. 가격은 둘째치고 옛 추억에 마냥 신기해하며 구입을 했는데, 가격이 그때와 똑같았다. 열 다섯에는 2,500원이 굉장히 큰 돈이었지만, 스물 다섯쯤에는 소주 한병 값이었던지라-_- 무턱대고 샀는지도 모르겠다.

이 샤프를 가지고 지금도 쓰고 있다. 3년전쯤부터 해서 필기구에 대한 욕심이 생겨, 고급형 필기구가 아닌 일반 필기구 중에서 가격이 꽤나 비싸더라도 (그래봤자 오천원은 넘지 않지만서도.-_-;) 하나쯤은 꼭 써야만 했는데, 이상하게 아무리 비싼 샤프를 보더라도 이만한 샤프를 못 찾겠는거다. 원산지인 일본에 갔을 때에도 이런저런 필기구들을 열심히 아이쇼핑했건만, 역시나 이만한 샤프도 없는 것 같았고. 그래도 지금 6년째 아무런 고장없이 잘 쓰고 있는거보면, 잘만들긴 잘만든 샤프인 것 같다.

징그러운 것이, 요넘은 또 잃어버리지도 않아요.-_-+ 3년전쯤엔가, 중국에서 잠시 귀국한 어느 날 하루... 술을 진탕먹고 가방을 통째로 잃어버린 일이 있었는데, 당시 그 가방을 줏은 아저씨의 집에서 일하던 조선족이 내 가방 안의 학생증과 중국어 논문들을 보고, 꼭 돌려줘야 한다면서... 무사히 받았던 일도 있는데, 그 당시에도 그 가방 안엔 이 샤프가 든 필통이 있었다. 아싸 까오리.-_-v

필기구 하나에 무슨 커다란 의미를 두겠는가마는, 그래도... 요넘으로 내가 이런저런 문자들을 써서 남기고 했으니, 동반자라 해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샤프보다는 볼펜을 더 자주 쓰이게 되던데, 그래도 꿋꿋히 샤프가 필요할 때가 있으니, 요넘... 아직은 줄기차게 나에게 부림을 당할 듯 싶다. 줄기차게 쓰고있다보면 중학교때 이 샤프를 썼던 넘들의 얼굴도 하나둘씩 생각도 나고.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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