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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이싱(宜興)의 여행가 쉬샤커(徐霞客)와 '양축(梁祝)' 이야기를 찾다.

우리팬 2009. 9. 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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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시 : 2007년 7월 19일


중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리우는 민간전설이 하나있다. 바로 '양산백(梁山伯)과 축영대(祝英台)'의 고사인데, 나는 소시적 봤던 영화 '양축'을 보곤 그려러니... 하고 그냥 생각했다. (드라마로도 몇번 채널을 돌리다가 본 적은 있지만, 시선 고정은 아니되더니만.) 뭐, 옛날 고전의 러브스토리는 뻔할 뻔자 아닌가. 신분이 맞지 않은 남녀가, 집안의 반대로 줄행랑을 치고... 잘되면 어디 숨어서 아들딸 잘 낳고 살아가는 것이고, 못되면 결국 둘이 죽음을 택한다... 뭐 이 정도. 다만 공통점이라고 갖다붙일만한 것은... 항상 여자쪽 집안이 남자쪽 집안보다 낫다는 점. 아마도 당시 사회상을 보면, 남자야 '三妻四妾' 할 수 있을만한 여건이 되었기에, 불행한 결말로 끝나는 이야기가 되려면 남자쪽의 신분이 떨어져야 한다는 점 정도. 내가 양채니(杨采妮)라는 배우를 제대로 익식하게 된 것도 바로 서극감독의  '양축(梁祝)'이라는 영화때문인 것 같다. (얼마전에 곰TV의 무료영화에서 '방콕 데인저러스'라는 영화에서 봤는데... 이쁘장한 태국 약사로 나오시더군. 대사 한만디 없는 벙어리역.-_-; 요즘 이 언니 뭐하시지?)

지난번 이싱(宜兴)의 샨쥬엔동(善卷洞) 이야기 이후에... 다음 코스를 포스팅하기가 너무 귀찮아졌다. 항상 하는 얘기지만, '여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여유'인데, 그 동굴을 빠져나간 후부터는 시간이 촉박해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저 스쳐지나치는대로 사진만 찍어왔기 때문에, 머릿속에 남은 기억도 없거니와, 그런 기억들을 일부로 짜집어서 넣느니 아니 남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나, 어차피 내가 거쳐간 과정이려니... 하고 남겨놓는 것일 뿐이라는거.-_-; (아, 변명 한번 길다.) 하여간, 별로 남지 않은 기억을 더듬어 더듬어, 그리고 평소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양축' 이야기도 알아볼 겸해서 포스팅을 해보기로 한다.


샨쥬엔동을 빠져나오니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바로 자그나만 폭포의 시원한 물소리였고, 그 폭포를 뒤로하고 가야할 길을 가다보니 왠 석상이 하나 보였다. 이건 또 누구시람. 이 양반의 이름은 쉬샤커(徐霞客, 1587~1641)로 명나라 말기의 '지리학자'이다. (쉽게 풀어보면 여행가이자 문학가이다.) 30년동안 열심히 돌아다니시어 260만자에 달하는 <徐霞客游记>를 남겼다. (그 중 200만자는 유실되었고 지금은 60만자만 남았다고 한다.) 중국의 역사에서 따지면 '지리학'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는 정도. 28살때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의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며 유람기를 남겼고, 55세에 윈난(云南) 지방의 리장(丽江)에 이르러 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자, 고향인 장인(江阴)으로 돌아왔와 56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사해각지를 떠돌아다니는 것을 결심하는데는 당시 그의 엄니의 영향이 컸다고.

“身为男子汉大丈夫,应当志在四方。你出外游历去吧!到天地间去舒展胸怀,广增见识。怎么能因为我在,就象篱笆里的小鸡,套在车辕上的小马,留在家园,无所作为呢?”

" 사내대장부로써 당연히 사해에 뜻을 두어야 하니, 너는 밖으로 나가 사해각지를 돌아다녀라. 하늘과 땅 사이에 이르게 되면, 가슴에 품은 뜻을 펼치고, 견식을 넓히도록 하여라. 어찌 내가 있다고 해서 너는 우리안의 새장안의 새나,  수레에 걸려있는 말처럼 있느냐. 집안에 있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지 않으냐."

뭐... 한마디로 집에서 책만 보면서 데굴데굴해봤자 남는게 없으니, 돌아다녀라... 라는 아~주 친절한 말씀.-_-; 이 말을 듣고 뜻한 바 있어 1년동안 여행을 하게된 것이 바로 22살때의 일. 이후 갖은 고생을 하며 동으로는 쩌장(浙江)의 보타산(普陀山), 서로는 윈난의 텅충(腾冲), 남으로는 광시(广西)의 난닝(南宁) 일대, 북으로는 허베이(河北) 지시엔(蓟县, 지금의 텐진)의 판산(盘山)까지... 대부분의 중국 각지에 족적을 남겼다. 이 얘기는 이 정도까지만 하고... 흠흠.

앞서 말한 지명들을 표시하니 뭐 이 정도.


처음엔 사실 이 곳만 지나갈 때만 하더라도 이 곳이 梁祝과 관련있는 곳일 줄은 몰랐다. 왠 남정네? 왠 아낙네? 무슨 예전에 난징에 있을 때 가보았던 정려원(情侣园) 정도라고 생각을 했었지비. 에공... 이런 곳은 또 그냥 지인들과 오기엔 좀 막막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비. 그래서 일단은 신경끄고 고고씽. 근데 아마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徐霞客의 석상을 찍고나서, 디카 설정을 잘못해서 이후부터 사진들의 색감이 여엉~ 이상하게 나와버렸다. 뭐랄까... 색소빠진 사진이 되었다고 해야하남. 게다가 무더운 날씨에, 햇빛이 너무나 밝아서 사진 색감이 정말 이상해져 버렸다.-_-; (초간단 색감보정을 해도 별반 차이가 없네.)

조그나만 호수에 아담한 정자. 캬~ 여기서 한잔하면~ -_-;;;

왠 서재?

분명 입구쪽엔 한쌍의 남녀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왠 서재?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무슨 안내표지판도 전혀 없었으니 알 도리가 없었지. 다시 생각교정, '아... 그냥 상하이(上海)의 예원(豫园)과 같은 부호들의 정원이구나.'라고.-_-;

영대각(英台阁) ?

엇... 다시 눈앞에 나타난 누각. 그런데 왠지 모르게 이름이 낯익다. 영대? 영대? 누구지? 어디서 많이 들었음직한 이름인디? 당췌 여긴 뭐하는 곳이냐 말이닷.

앗... 蝶園?

이거원... 안내표지 하나 제대로 없이 돌아다니니 발걸음은 더더욱 빨라질 수 밖에 없었다. 그다지 볼만한 것도 없었고. 에이, 어서 벗어나자고 일행들을 재촉하는데 눈앞에 나타난 蝶園. 여긴 뭐냐... '또 무슨 나비들 박제해서 액자 만들어놓은 그런 곳이냐?' 했지비. 거참 정체를 알 수 없는 곳이네... 하면서 별 생각없이 그냥 지나칠려는 찰나, 왠지 모르는 떠오르는 한 이야기에 관한 발상. 에이 설마... 하필 여기 왜?-_-;

다시 나타난 영대. 영대찻집? -_-+

여기서 茶 한잔해도 되겠더니만.

아까 봤음직한 남녀가 다시 나타나고... 이때 눈치를 깠어야 했는디. (팔모양, 날개-_-;)


화원인지... 나비 전시실인지 모를 속닥한 실내를 바로 빠져나가자... 드디어 우리가 지나쳐온 곳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어찌나 힘이 빠지던지, 헛웃음만 연발.-_-; 나 중문과 맞나... 싶었을 정도.ㅠㅠ

드디어 정체가~ -_-;

아까 지나쳐 올 때의 '영대(英台)'는 그렇게 나에게 있어선 익숙한 단어가 아니었다. 내가 그 언니 이름을 불러봤어~ 그렇다고 드라마도 제대로 본 적도 없으니. 그냥 단순히 낯익는 고유명사겠다, 생각을 했는데... 딱 그 곳을 빠져나가자... '양축(梁祝)'이라는 단어가 뇌리속에 팍~ 찔어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곤 속으로 '양채니!'를 외쳤다지.-_-v 무슨 미로찾기 하러 들어간 것도 아니고, 퀴즈대회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뭔지도 모르고 룰루랄라 디카 셔터만 누르면서 지나쳤으니 얼마나 허무했겠는가. 그리 관심있는 얘기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옆에 있던 후배들에게 아는 체(?)는 할 수 있었겠지비. 그나저나 양산백과 축영대가 여기 왜 있냐고오~ 하는 궁금증이 또 생기더라고.

'양축'에 관한 이야기를 간단히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동진(东晋) 시대에 한 처자가 남장을 하고 공부를 하러 서당엘 갔다. 거기서 한 남정네를 알게되는데 처음엔 동창으로서 의기투합되었으나 이후에 처자인 축영대는 양산백에게 애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축영대의 신분이 밝혀지고 둘은 서로 이성으로써 좋아하게 되는데, 축영대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잘난 집안 출신인 축영대는 당연히 부모의 반대에 부딫히고, 양산백은 그녀를 그리워하다가 결국 죽게된다. 양산백의 무덤가에서 통곡하고 있던 축영대. 순간 무덤이 열리기 시작하더니 그 곳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무담이 닫히면서, 나비 한쌍이 하늘위로 날라가기 시작한다... 뭐, 이 정도가 내가 아는 양축의 이야기.-_-;

근데, 이 민간 설화에 관한 것은 모두 몇가지의 제각기 다른 역사적 기원이 있다고 한다. 그 中 이싱과 관련된 기원을 이야기해 보자면, 역사의 기재에 따르면 양축 이야기가 최초로 문헌에 기재된 것은 이싱에서였다고 한다. 중국 짱수성의 학술계, 역사계, 여행계(?)에서의 전문가들은 宋咸淳의 <毗陵志>에서부터 명대의 冯梦龙의 전기소설 속에서, 모두 대량의 증거가 되는 글들이 나타났다고. 거기에 따르면 양산백과 축영대는 모두 이싱 사람이라는 것. 뭐, 毗陵志나 冯梦龙의 전기소설을 내가 읽지 않아서 이러쿵 저러쿵은 못하고... 다만, 중국내에서도 이 양축 이야기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허난성의 여남(汝南)현, 후베이의 马坡村, 쩌장의 닝뽀(宁波)와 같이 지리적인 기원도 의견이 다를 뿐더러, 심지어 진(晋), 동진(东晋), 송(宋), 명(明)등과 같이 시대적인 기원도 의견이 제각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포스트의 제목과 관련된 글은 이 정도까진데...
아, 쓰는 김에 나머지 부분도 써놓는게 낫겠다. 또 다른 제목으로 새 포스트를 쓸려면 몇달 걸릴 듯.-_-;


그건 그렇고... 이싱의 샨쥬엔동 코스 中에 두번째는 이렇게 끝난다. '양축' 관련 건물 몇채 지나서 마무리는 나비전시실(?) 정도. 그 다음 코스는, 샨췝스(善权寺)라는 오랜 역사를 가진 절과 궈샨비(国山碑)를 살짝 구경하고나면, 어쩌면 이 관광지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华东第一滑'이다. 이게 뭔고하니, 케이블카를 타고 산 정상으로 올라가서 이래저래 구경 좀 하고 내려갈려고 하면, 도보로 갈 수 있는 길이나 케이블카가 아닌... 돌로 만든 긴 미끄럼틀이 나온다.-_-; 이게 말이 미끄럼틀이지, 경사도 만만치 않고, 게다가 돌로만든 미끄럼틀인지라... 겉보기에는 무서웠을 정도였다.-_-; 문제는 옷차림과 손인데... 만약 이것을 탈 때 짧은 반바지를 입어 살깢이 많이 데이면... 그리 쉽지 않은 놀이가 될 것이며, 아무래도 길이도 길이인만큼 손잡이를 잡고 사는 손을 보호해야 한다. (이래서 역시 따로 손장갑을 시중보다 비싸게 팔고 있더라고.) 우째우째 타고 내려오긴 했는데, 역시나 또 상업성~ 타고내려가는 찰나를 찍어 사진을 또 팔더라고. 이건 뭐 굳이-_-;;;

산정상에 있는 善权寺.

이 절도 생각치도 않게 오래된 곳이더군.

뭐가... 분명 '善卷洞'이라는 이름을 걸고 만든 관광코스인데, 없는 것이 없었다. 정상에서 또 보게된 것은 샨췐스(善权寺)라는 절. 이 절은 역사서에 따르면 중국의 남북조 시대, 즉 서기 480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지금의 모습은 2000년 보수공사를 하여 보존해 놓은 것. 그냥 향 하나 피우고 내려가면 끝.-_-; 입구 현수막에 자랑스레 절의 역사를 알려주는 샨췐스 탄생 1603주년.-_-; 오른쪽 사진의 길상종(吉祥钟)은 일반인들도 칠 수 있다. 아니, 일반인들을 위해 나둬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점. 종소리 한번은 무엇을 기원하고, 두번은 무엇을... 이런 식이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안내표지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종 세번치는데 RMB 5元.-_-; 이건 뭐... 난징의 부자묘(夫子庙) 안에서도 몇번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관심끄고 돌아섰지비.

종 한번은 우리말로 하자면 만사형통, 모든 일이 돛을 단 배가 바람을 잘 받아 나아가는 듯이 되길 기원하는 것이고,
종 두번은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각인이 되어 잘 이루어져라, 라는 말 같고,
종 세번은 우리 가까이 있는 세 별, 즉 복성(福星), 녹성(禄星), 수성(寿星)의 신선들로 하여금 복, 재물, 장수를 기원,
종 네번은 사계절 항시 돈 많이~ 벌길 기원...
종 다섯번...이랑 여섯번은 안 보인다. (이것까지 지금 찾기엔... -_-;)

하여간 산정상에서 바라보는 이름모를 산-_-의 경치는 참 좋았다. 날 더웠던 것외엔 괜찮은 코스였3.

조용한 산길을 걷다보면...

또 나타난 왠 영님. 아... 누구세염!?

이 곳은 빠이도우탄(拜斗坛)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남북조 시대에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어느날 밤, 당시 수도였던 난징의 자금산(紫金山)에 왠 선인이 꿈에 나타나 阳羡国山에 물의 신(水神)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이후 양무제는 신하를 파견하여 여기에다가 기우제를 위한 제단을 만들었고... 뭐, 과연 영험했다고.-_-; 그래서 저 영감님은 水神이라는 말인가?-_-; 아님, 양무제? 아님 제단을 쌓은 신하?-_-;;;


아마도... 확실치는 않으나 이 산의 이름은 '阳羡国山'인 것 같다. 이 곳에 만든 비석이기 때문에 줄여서 '国山碑'라 하는 것 같고. 이 비석의 역사는 또 우리가 '삼국지'를 통해 잘 아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때는 서기 276년, (물론 우리가 잘 아는 조조, 유비, 손권등은 다 세상을 떠난 이후다.-_-;) 그러니까 이 강남 지방은 알다싶이 오나라(吴)의 영토였고, 당시 오나라의 황제는 폭군으로 알려진 손호(孙皓)였다. 이 아저씨를 끝으로 삼국시대가 완전히 끝이 나고 사마염(司马炎)이 세운 서진(西晋)이 시작되지요. 하여간 당연히 제대로 된 황제가 아니니 나라는 망했을터인데, 손호가 한 짓이 또 만만치 않아 '폭군'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날 지방관료가 왠 동굴을 발견했는데, 이 동굴이 바로 善卷洞이었다. 이 일을 상서롭다고 여겨 손호에게 알렸고, 손호는 신하를 파견해 원래 묵산(墨山)이라 부르던 이 산을 국산(国山)이라 개명하고, 이 곳에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비석의 내용이야 뭐... 비석을 세운 기원, 상서로운 조짐이니 공덕을 노래하고... 뭐 이 정도. 장수성(江苏省)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이라고 하는데... 이 비석이 세워진 후... 5년 뒤에 동오(东吴)는 멸망하지비. 비석하나가 중요하기보다는... 역시 사람이 문제였지비. 시간관계상 안에까지 들어가서 비석을 직접보진 못했는데... 대강 이런 모양.

그리고 끝으로... 산을 내려올 때 타야했던 华东第一滑.

아무래도 현장에 집중하다보니 사진 찍을 생각을 못했다.-_-;

이번 포스트는... 에고야~ 이 정도까지 합시다.


하여간 이 샨쥬엔동(善卷洞) 코스의 표값(全价)은 120元이라는 것.-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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