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今.生.有.約./→ 雜感

'人生'이라는 것은 색칠공부.

우리팬 2010. 11. 25.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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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고 세상에 태어났을 때, 그리고 어느 정도 교육의 현장에서 라이벌 의식 따위와 같은 사회생활에서의 연습을 겪고 난 후, 혹은 이래저래 이런저런 경험을 거치고 난 후... 그제서야 나는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고민을 하기 나름이다. 물론, 나는 앞으로 이렇게 살 것이다, 라고 떳떳하고도 당당하게, 혹은 나를 낳아준 부모님부터의 기대감에 충실하기 위해 나름 계획되어진 인생을 살아가는 아주 행복한(?) 이도 있다. 허나, 적지 않은 이들은, 살다보니 이럴 때도 있고, 이럴 때도 있다보니 저럴 수도 있고, 이러쿵 저러쿵 이리 치어가며, 저리 치어가며 살아온 케이스도 분명 많을 것이다.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실패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인가. 어쩌면... 나름 안정적인 가정환경에서, 나름 만들어진 틀에 의해 짜여진 계획에 의해서 무난하게 꿋꿋히 자기 삶을 채워가는 이들도 있겠지만, 괜한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밤,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며, 그렇게 살기 위해서 무엇을 할 줄 알아야 하는가 고민하는 이도 적지는 않다는 말이다. 나는 후자다.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부모님으로부터 '공부해라!' 혹은, '숙제해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을 뿐더러, '앞으로 너는 무엇이 되라'라는 말도 단 한번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다보니, 정작 내 입장에서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만 했으며, 또 그럼으로 인해서 하고싶은 일을 하기 위해선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가, 에 대한 자연스러운 고민이 생겼다. 솔직히 적지 않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엇이 제대로 된 삶인지 모르겠다. 한때 내 나름대로 꿈이라는 것을 꾸었던 적도 있었지만, 이 역시 나이를 먹고,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부딫혀오면서, 내가 아무리 몸부림, 발버둥 쳐봤자, 사회적 환경 혹은 대인관계에서의 한계는 나 하나만의 능력 혹은 주장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더라, 라는 좌절감도 맛보기도 했다.

살아가는건 소시적했던 색칠공부와도 같다.

그저, 묵묵히 내가 살아가는 한 부분을 노력해서, 집중해서 색칠을 하고... 그로인한 나름대로의 행복을 추구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소시적 기억 때문에, 혹은 집안에서의 영향 때문에 조금이라도 남의 등을 밟고 올라설려고 발버둥 치는 일은 사실 양심적으로나마 못해먹겠다. 나라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고 아무리 떠들어 대봤자, 나름 조직적이고도 통일된 의견을 수렴하여 모인 사람들을 모을 수 없게 되면 그저 나의 생각은 곧 망상이 되러버리는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꿈을 꾸는 것만큼 인생에 있어서의 행복도 없을 뿐더러, 그 꿈이 실현됨으로 인해서 만끽할 수 있는 인생의 보람은 없으리라. 하지만, 이것도 사람에 따라서는 그 만족도가 제각기 다르다보니, 과연 꿈을 꾸는 것조차가 사치로 느껴질 때도 적지 않다, 라는 말이다.

고로, 이런 시점에 와서 문득 드는 생각은, 소시적 했던 색칠공부와 같이... 나에게 맡겨진 일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며, 또 일을 한 만큼에 대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것 역시 행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다보니까 잘하게 되는 것이고, 잘하게 되다보니 하게되는 것이다, 라는 솔솔찮게 나오는 속설과 같이, 어떻게보면 세상을 바꾸는 허무한 메아리보다는, 내 스스로 떳떳하고, 내 스스로 내 인생에 대해서 노력하는 것만 남기더라도, 그리 길지 않는 인생을 보람차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을 했다.

윤동주 시인의 詩에서처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한 점 없이 산다, 라는 것이... 어째,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쉽게 입에서 내뱉을 수 있는 말이겠는가. 나 혼자가 당당하더라도, 내가 속해질 수 밖에 없는 집단에서 어디 버틸 수나 있는가, 라는 말이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고, 세상이 이러니 이럴 수 밖에 없었다, 라고 죽기 전에 한풀이를 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고, 사심없이, 그리고 윤리적이고도 도덕적으로 우리 후세에게 남겨줄 그 미래를 위해서라는 생각만 한다면, 어디 누가 부정부패를 저지르겠으며, 누가 편법을 사용하여 자기 자리를 지키기에만 급급하겠는가, 하는 얘기다.

살아가는건 소시적했던 색칠공부와도 같다.

내가 칠할 수 있는 부분, 나에게 맡겨진 부분만이라도 제대로 칠할 수 있다라고만 생각한다면, 그다지 문제는 없을 듯 한데, 괜한 자기 자존심, 욕망, 야망에 남이 칠할 부분가지 칠한답시고 자신의 역량의 한계를 넘어선 부분까지 욕심내다보니 제대로 칠하지도 못하면서 이런저런 편법내지, 비양심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까나, 도 싶다. 세상에 그 어느 누구가, 자기가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할 때 '나는 이렇게 살았다'라는 식의 자서전을 남기길 희망하지 않겠는가. 허나, 막상 남길려고 하면 이런저런 부분에 있어서 괜한 찜찜한 구석에, 괜히 없애고 싶은 부분에 맞닥트려져, 머뭇거리는 일 또한 비일비재할 것이다. 자서전... 자기 자기이 직접 써야하는 작업을 왜 작가들이 대필이나 하고 있냐고.-_-;

인생사, 라는 것이... 나이를 먹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금은 당장 커다랗고 내 인생을 좌지우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될진 몰라도, 결국에 있어선 말 그대로 시간이 해결해주는 일 역시 비일비재할 것이다. 지금 순간이 아무리 힘들고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그 당시만 버텨내고 이겨낸다면 돌아오는 달콤한 열매 역시 나 혼자서 만끽할 수 있는 보람만은 아닐지어이며, 또한 지금 살만하고, 행복하고, 세상에 부러울 것 없다, 라고는 생각되지만 다시금 되돌아 생각해본다면 내가 이 정도로 살아오는데 있어서 과연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한점 없었나, 라는 질문을 되물었을 때, 또 거기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면 돌아오는 자기에 대한 실망감내지 불신은 더없이 클 수 밖에 없을지어이다.

살아가는건 소시적했던 색칠공부와도 같다. 어느 정도 살아봤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크레용이 무슨 색깔이며, 어느 부분을 칠하고 있는지 정도는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성선설, 선악설 따위는 믿지도 않는다. 다만, 사람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간사해질 수 밖에 없고, 이기적일 수 밖에 없다, 라는 것은 믿는다. 살만하면서도 죽겠다~ 라고 투정부리는 사람들을 보면, 꼭 시험공부 다 해놓고 친구와의 전화에서 '공부 하나도 안했다~'라고 뻥치는 얘기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정말 힘들고, 괴로운 사람들은 남에게 그런 투정할 여유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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