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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강호(笑傲江湖)』와 영호충(令狐冲), 그리고 악불군(岳不群).

우리팬 2010. 2. 24.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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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글 : 2008년 11월 7일

언젠가부터 짬이 날 때마다, 그러니까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나, 심지어 아파트를 내려가는 엘레베이터 안에서, 혹은 잠이 안와 잠시나마 딴짓거리를 할 때... 일명 '시간 떼우기'를 할 때마다 핸드폰이나 전자사전 안에 있는 '텍스트 뷰어'를 이용해서, 10년전, 아니 근 20년전에 읽었던 김용(金庸) 선생의 작품들을 짬짬히 읽어나가고 있다. 별다른 의미는 없다. 단지,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멍하니 창밖이나 사람들을 둘러보기엔 별다른 재미가 없거니와, 그렇다고 읽어야 하는 책들을 읽기엔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이런저런 음성화일들을 들으며 잠을 잤지만, 언젠가부터는 잠이 들기 직전, 그 고요한 상태가 어찌나 평온한지 그것을 느끼기 위해서 눈이 감기고 잠이 들기 직전 몽롱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 뭐라도 하나 더 읽기로 했다. 책을 읽기엔 자기 전에 불끄기가 귀찮고, 또 휴대용으로는 핸드폰이나 전자사전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용하는 것 뿐이다. 그려러니 했는데... 벌써 이 짓거리가 반년이 훨씬 넘었다.-_-; (우째우째 구해진 김용선생의 무협지 TXT화일들, 특히 그것들을 타자화 시킨 분들에게 고마울 따름.)

이제까지 읽은 것은 영웅문 2부, 3부인 신조협려와 의천도룡기, 그리고 소오강호였으며, 또한 책으로는 읽지못한 연성결까지도 전부다 읽을 수 있었다. 요즘은 천룡팔부를 갓 읽기 시작했다. 연성결은 80년대에 홍콩의 TVB에서 찍은 곽진안, 여미한, 증강, 사녕 주연의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드라마의 내용과 원작 내용과는 별로 다를 바는 없었던 것 같다. (역시나 8,90년대 홍콩 TVB 무협물들은 00년대부터 나온 대륙판 시리즈물보다 좀 더 원작에 충실한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미 다 아는 내용을 책으로 다시 읽는 재미도 있겠지만, 나는 소시적부터 책보다 무협시리즈를 영상으로 먼저 본 것이었고, 책이 주는 재미를 그다지 느끼지 못했었다. 내용이나 전개방식이 비슷하다면, 원작인 글이 낫은지, 영상으로 된 2차 창작물이 낫은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있는 숙제이긴 하지만, 일단 내 경험 자체가 영상 먼저, 글자 이후였으니... 별다른 바 없이, 그냥 확인 단계를 거쳤던 것 같다. 이게 고딩 1학년때까지 이야기이다. 초딩때부터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 있는 무협시리즈를 섭렵하기 시작했는데, 중학교때부터는 책을 직접 사서 읽어나갔었다. (아, 책값~ 이 돈으로 딴 책을 샀으면...-_-;) 물론 그렇다고 김용선생의 모든 작품들을 구매했던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인 것들, 특히 내가 본 비디오에서 기억에 남는 것들만 사게 되었는데, 딱 '연성결'은 빠져있더라고. (아참, 협객행도... -_-; 이건 원작과 내용이 다른데, 스토리 전개상으로는 영상물이 좀 더 낫은 듯.) 아무래도 다른 작품들보다는 짧은 편이었고, 이에 더불러 협객행 역시 당시 동네 서점에는 팔리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암튼 난, 초딩때부터 어지간한 김용 선생의 작품들은 영상을 통한 드라마로 거의 다 보았고, 또한 고1때까지 어지간한 김용선생의 작품들을 글로써 다 읽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친구들보다는 '무협'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오타쿠로 취급되었고, 또한 나 역시도 자연스레 중국에 대한 나라와 가까워지고, 최근 몇년까지도 '무협'을 주제로 중국인과 대화를 할 때면 시간가는 줄 몰랐다. 단, 김용선생의 작품에 한해서이다.-_-;

그런데 말이다, 확실히 소시적에 보았다, 읽었다라고는 하지만, 나이를 좀 더 먹고 다시 보거나 읽었을 때는 감흥은 확연히 다른 것 같다. 어릴 적에는 재미를 위해, 마약과 같이 할 수 없이 자연적으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면, 지금에 와서는 별 생각없이, 꼭 보고싶어서 혹은 읽고 싶어서 읽는 것도 아닌데, 그때의 해석과 지금의 해석은 확연히 다른 것 같다. 뭐, 세상 조금 더 살아봤으니까 그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되지만서도, 읽으면 읽을수록 드는 생각은, 나 역시 무협의 영향을 받아 내 나름대로의 가치관의 형성과 관련이 있겠지만, 나이를 좀 더 먹고 읽어보니, 차라리 예전에 읽지 않았다면, 그 당시에 별다른 실수없이 그냥 넘어가게 된 경우도 있지 않았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 '소오강호(笑傲江湖)의 영호충(令狐冲)에 대한 이야기이다.


무협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일반화 되어버린 가정 中의 하나가, 한 여인의 향한 일편단심과 또한 그렇다고 해서 주변의 다른 여인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닌 '다정(多情)', 그리고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어 자신의 능력이 향상되는 '기연(奇緣)', 마지막으로 항상 정의를 위하면서도, 결국엔 그가 추구한 정의가 무엇인지 고뇌를 하다가 모든 것을 이루기 바로 전에, 명예과 권력을 뒤로 하고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행복을 찾아 떠나는 모습' 정도라고 하겠다. 이런 점들은 김용선생의 작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가 있는데, 일단 생각나는대로 소오강호의 이야기를 꺼내보고자 한다.

영호충은 고아이다. 그리고 부모님같은, 아니 부모님 역할 뿐만 아니라 스승의 역할을 하는 군자검(君子劍) 악불군(岳不群)의 밑에서 자라지만, 엄한 스승의 영향보다는 자신의 천성인 자유분방함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소오강호의 내용이 끝날 때까지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면 바로 악불군의 딸, 영호충의 사매인 악영산에 대한 일편단심이다. 소오강호의 시작과 동시에 의림이라는 비구니와 또한 이후에 인생을 더불어 사는 임영영과의 만남에 있어서도 어릴적부터 같이 자라온 악영산에 대한 집착은 절대 버리지 못한다. 임영영 또한 그러한 영호충의 모습에서, 남자로써의 책임감 혹은 숭고한 사랑을 높이 사며, 그에게 빠져들게 되는데... 처음엔 그렇다 치더라도, 나중에는 정말 미련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악영산을 잊지 못한다. 6,70년대식의 순애보적인 사랑 이야기인가... 이걸 남녀간의 사랑이라고 해야하는지, 죽마고우의 정(情)이라고 해야하는지... 지금에 와서보면 절대 그렇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래도 사람들의 마음 속 한켠에는 이미 지나가버린 사랑에 대한 미련은 어느 정도 남아있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남아있기만 해야지, 남은게 쓸모가 있어져 버리면 큰일난다.-_-;) 

영호충은 (사실 영호충 뿐만 아니라, 김용선생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대게 다 그렇다만) 의림, 그리고 임영영과 알게 되면서도 그녀들에게 자신 스스로는 최소한 俠의 명분으로 위험에서 구해주며, 만남에 있어 존중한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또 그렇지 않다. 상대방은 해야할 도리를 다 한다고 잘해주거나, 혹은 도움을 주는 것이겠지만, 사람에게는 '받음'의 행위보다는 스스로 느끼는 '받음'의 의미가 마음 속 깊이 새겨지므로, 비구니 신분인 의림 역시 작품의 결말 때가 될때까지 영호충에 대해 이루지 못하는 사랑임을 알면서도 그의 행복을 기원하는 순정을 가지며, 임영영은 악영산에 대해 여러모로 집착을 가지는 영호충에 대해 그녀의 여자로써의 질투를 절대 그에게 보이기는 커녕, 되려 미리 이해를 하기까지 한다. (이게 소설이니까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하다.) 사실 따지고보면, 김용 작품내에서의 여자들의 질투하는 모습은 여러 차례 그려져 있기는 하나, 그 문제 때문에 야기되는 것은 주변인물들에게 일어나는 부수적인 사건들밖에 없다. 주인공은 결국 정해진 인연에 따라가는 것이다.
 

아, 영호충役의 윤발형과 악불군役의 증강 아저씨는 찰떡궁합이었다.

사부의 명으로 사과애에서 면벽을 해야하는 영호충에게 찾아온 필연적인 기회, 바로 '풍청양(風清揚)'이라는 같은 파 선배고인을 만나게 되는데, 이 역시도 풍청양이라는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 소오강호의 이야기는 더이상 전개될 수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증진된 영호충의 무공에 은근 시기하는 악불군의 모습에서, '청출어람'이라는 유교적 성어보다도, 사람의 내면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면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낳은 것은 아니지만, 키워준 분들 부모로써 대하는 것이 있다면, 키움으로써 자식같이 대하는 것도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나 소오강호에서의 군자검 악불군은 자신의 사숙인 풍청양이라는 인물이 영호충에게 전수해준 무공을 인정하려 들지 않으며, 더우기 사람의 추잡한 본능을 보이기 시작한다. 고사성어 또는 4사성어라는 말들은, 중국인들의 지난 수천년동안 뇌리속 아니 뼈속깊이 파고드는 인생의 진리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보다 먼저 서양을 향한 문을 열게된 중국이 1900년대에 이르러서는 일본보다 더 늦을 수 밖에 없었던 것 또한 그들이 갖고 있던 습성, 관습등의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용작품내에서의 일명 '군자검'이라는 별칭을 가진 악불군은 자기보다 잘난 제자를 절대 용납하지도, 그리고 인정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래서 그의 야망을 향한 목표에 눈이 멀어, 거세를 하면서까지 피사검법을 익히게 되는 것이다. 단지 자신의 야망이나 명예를 위해 눈앞의 이익을 쫓으며, 가족은 물론이고, 제자들과 주변인들까지 안중에 두지 않고 자신을 버리기까지 한다. 소시적에 이 대목을 보았을 때는 단지, 악불군이라는 사람이 욕심이 많아서, 야망이 커서 자기 스스로 무너진 꼴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든 생각은 어릴적부터 직접 키우고 가르친 제자가 자신보다 더 뛰어나게 된 것으로 인한 자격지심의 영향이 그 시발점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짜등가 영호충은 세속의 규율에 굳이 얽메이지는 않으면서도, 그래도 '협(俠)'을 위해 이런저런 것들을 겪고, 해결해 나가기 시작하는데 그 역시도 이후에는 모든 세속의 지위 그리고 짐들을 다른 이에게 넘기고, 배우자인 임영영과 더불러 은거를 하게 된다. 세상사 일장춘몽, 결국 여느 작품에서와 같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강호라는 세상을 겪으며 느꼈던 것들에 대한 답이 바로 '소오강호(笑傲江湖)'라는 제목의 뜻이 아닐까 싶다. 강호에 몸담으며 그 곳의 도리와 규칙에 따라 평생을 행동하였건만, 결국에는 '강호'라는 세상 역시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드는 욕심의 세계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정파(正派)든, 사파(邪派)든 편만 갈랐을 뿐이지, 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같다. 그들이 하는 행동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소오강호(笑傲江湖)'의 어원.

 사실 김용선생의 작품의 전반적인 결론을 보면, 중후반부에서는 꼭 대의를 위해 이 한몸 받치는 주인공이 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할만큼 다 하고, 그래서는 아니지겠지만 결국은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간에 그 자리를 털고 사라지는 것이다. 몽고여자인 조민을 위해 명교의 교주를 버리고 떠나는 의천도룡기의 장무기의 모습이나, 강호 제일의 실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척방의 아이를 안고 변방으로 떠나는 연성결의 적운의 모습, 그리고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살겠다는 신조협 양과는, 남들에게 대협의 칭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묘로 들어가 은거를 한다. 사실 역사적 사실과 혼합한 내용을 주로 쓴 김용선생 작품의 한계라고도 말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는, 결국엔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세상, 생활을 위한다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요번이 소오강호를 끝까지 읽으면서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단어는 바로 '믿음(信)'이었다. 믿음이 없다면 오해를 할 수 밖에 없으며, 오해는 곧 불신을 말한다. 믿음은 쌓기 힘들지만, 또한 무너지기도 쉬운 것으로, 이는 인간관게에 있어서 상당히 무서운 것이다. 믿어주길 원하거나, 혹은 이제까지의 나를 수십년간 봐왔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왜 영호충의 말이나 언행을 사부인 악불군이나 그의 첫사랑인 악영산은 믿지 못했을까였다. 한번이라도 제대로 얘기를 했다면, 아니 그래도 고아때부터 키워오고, 같이 자란 죽마고우라면... 어떠한 행동을 보였든지 간에 믿음을 보여줄 수 있을텐데... 라는 안타까움이 남았을 수 밖에......


김용 작품을 시대순으로 보면 사조영웅문(南宋) -> 신조협려(宋末) -> 의천도룡기(元末) -> 소오강호(明初) 정도이다. 사조영웅문에서는 스승을 어버이 같이 보라는 유교의식이 팽배해져 있으나, 신조협려에서는 스승을 아내로 삼는다는 이야기, 그리고 의천도룡기에 이르러서는 주인공의 스승이 분명치 않다. 소오강호에 이르러서는, 스승 역시 사람이며, 사리사욕을 가진 이를 스승으로 삼아야 하겠냐는 문제제기를 해놓지 않았을까, 하는 망구 내 생각.-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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